축구용품업계 최강자, (주)카포 곽중철 대표

곽중철 대표는 축구용품을 전국에 공급하며 연 매출 250억 원을 올리는 국내 축구용품업계의 선두주자다. 그러나 곽 대표의 성공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국내 신발산업이 호황일 때 축구화 제조의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본 야스다스포츠의 축구용품을 OEM 방식으로 제작했었는데, 점차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로 마음 먹었다. 길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80년대 말 유소년 축구팀 단장 자격으로 일본을 찾은 곽 대표는,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찾았고 여기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었기 때문에 국내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를 위해 외국에 나가면 축구용품을 한 보따리씩 구입해 입국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방문했죠. 그때만해도 국산 축구화는 KIKA 제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축구화가 없었어요. 반면, 일본 축구화 시장은 아디다스, 푸마, 미즈노, 아식스 등 메이커 선택의 폭이 참 넓고 품질도 좋더라고요. 특히 많은 애들이 고민 끝에 국산 축구화의 몇 배가 넘는 선수용 축구화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다양하고 질 좋은 축구용품에 목마른 국내 축구인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축구용품 멀티샵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90년 동대문운동장에 한국 최초의 축구용품 전문샵을 오픈 했지만 출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단 유명 메이커 상품을 취급하고 싶어도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곽 대표는 성공의 걸음마를 같이 할 파트너를 사방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이때 1990년 중반부터 축구용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나이키가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쌓은 30여 년의 기술력과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축구용품 유통 사업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축구 용품의 황무지인 우리나라에 새로운 낙원을 만들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몇몇 메이커의 직영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많은 고민 끝에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파트너로 당시 축구화 시장에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던 나이키를 점 찍었고 오랜 권유 끝에 마침내 그들과 손을 잡게 됐죠. 나이키 역시 기존의 방식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유통 방식으로 시장 개척에 나서려고 하는 마음이 컸어요. 결국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게 됐습니다.” 곽 대표의 전략이 주효하자 다른 유명 브랜드들도 자연스레 곽 대표의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축구용품을 수주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 곽 대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매장 일일 평균 방문객이 3,000여명에 달했을 정도로 축구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축구용품업체로서는 최초로 B2B 인터넷 주문 시스템 개설과 업계 최대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EPR 시스템 구축을 통해 K-리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리그 정보와 각종 제품을 국내 시장에 선보이는 등 선진 축구문화 보급의 화수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축구 마니아의 지상천국인 일본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최근 우리나라도 점차 보는 축구에서 직접 즐기고 느끼는 축구로 탈바꿈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어요.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매력적인 축구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실제 전문화된 스포츠 카테고리를 만끽할 수 있는 멀티용품숍의 매력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보면서 국내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 축구화 프로모션을 위해 저희 카포스포츠 매장을 찾은 호나우지뉴마저 잠시 중력을 잃고 쇼핑의 매력에 빠졌을 정도니까요. (웃음)” 그러나 곽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적 경제한파 속에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10년 후를 대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곽 대표는 현재 위치가 미래의 경쟁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친다. 현재 국내 축구유통업계 최초로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곽 대표는 앞으로 수익 창출 사업뿐만 아니라 선진 축구 문화의 정착과 유소년 축구 육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자구적인 노력을 통해 카포스포츠를 한국 축구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 동안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초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등 많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선진화된 축구 인프라 구축에는 미흡한 점이 많고 자성의 목소리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는 한국 축구의 발전이 없다면 카포스포츠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요구 속에 축구업계의 선두주자인 카포스포츠의 사회적인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카포스포츠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축구 협회와 프로구단 등과 연계해 유소년 축구 육성 프로그램, 용품 지원 등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향후 몇 년간 폭 넓은 투자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정말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제게 있어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며 그 기대와 믿음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제 의무이자 책임이니까요.

06월24일

발목있는 축구화의 원조는 '판 바스텐'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맟추어 출시된 '발목 있는' 축구화인 머큐리얼 슈퍼플라이 4를 선두로 아디다스와 푸마에서 발목있는 축구화를 이미 출시했거나 곧 출시할 예정이다. 최근 많은 선수들이 착용하고 있는 '발목 있는' 축구화의 시작이 머큐리얼 슈퍼플라이 4의 출시년도인 2014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초에 발목을 감싸는 축구화 즉, '농구화 같은 축구화'를 신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 바스턴이다. 판 바스턴은 역대 세계 최고의 센터포워드 아니던가! 그가 어느 정도로 위대한 공격수였는지는 현역 시절 우승 및 개인상 수상 경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82,84,85년 네덜란드 리그 우승(아약스) 84-87시즌 4년 연속 득점왕(아약스) 87-88시즌 SERIE-A 우승(AC밀란) EURO88 우승(대회 MVP 및 득점왕(5골)) 88-89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89년 도요타컵 우승(AC밀란) 89-90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90년 도요타컵 우승(AC밀란) 91-92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2-93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3-94시즌 SERIE-A 우승(AC밀란) 89-90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91-92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88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88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89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FIFA 선정) 92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A매치 기록: 58시합/24골(네덜란드 역대 2위)       이처럼 판 바스턴의 현역 시절 경력은 화려함을 넘어 빛이 난다. 그러나 그는 현역 생활 동안 늘 부상에 시달렸다. 판 바스턴의 대표적인 부상 일지는 다음과 같다. - 아약스 시절 - 86년 오른쪽 발목 부상 후, 수술 87년 왼쪽 발목 부상(전치 2개월) - AC밀란 시절 - 87년 오른쪽 발목 부상(전치 12개월) 92년 왼쪽 발목 부상(철심을 박는 수술) 93년 5월 오른쪽 발목 부상(벨기에에서 수술) 판 바스턴의 부상 부위는 대부분 발목이었다. 축구 선수들이 발목 부상 을 많이 당하긴 하지만 판 바스턴처럼 발목 한군 데만 집중적으로 그것도 여러 차례나 다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판 바스턴이 발목을 감싸는 축구화를 신기 시작한 것은 92년 경이었다. 그 해, 왼쪽 발목에 재차 심한 부상을 당한 판 바스턴은 발목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이 부상을 계기로 당시 판 바스턴을 후원하는 이탈리아의 DIADORA사에서 그를 위해 발목을 감싸는 ‘농구화 형태의 축구화’를 특별히 제작했다.           축구화 모델 명은 Super goal. 판 바스턴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델 명이었다. 당시 DIADORA사에서 제작한 Super goal은 캥거루 가죽을 소재로 한 검정색 축구화였는데 발목 및 복숭아뼈를 완전히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발목과 복숭아뼈를 감싸는 부분은 가죽이 아닌 부드러우면서 탄탄하고 신축성있는 스폰지 소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목을 사용하는데(움직이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Super goal 축구화는 판 바스턴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모델이었던 만큼 대량 생산은 되지 않았다. 현재 Ebay에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판 바스턴은 93년 5월 프랑스 마르세유와의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또다시 오른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이 부상으로 인해 판 바스턴은 벨기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결과가 매우 좋아 94년 미국 월드컵 출전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의외로 회복 기간이 길어졌고, 결국 정상 컨디션을 되찾지 못하면서 95년 8월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 때 판 바스턴의 나이 만 30세. 절정의 기량을 뽐낼 나이였다. 그의 조기 은퇴는 본인은 물론 더 나아가 세계 축구계의 비극이기도 했다 판 바스턴 외에 발목을 감싼 축구화를 신었던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는 9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과 AC밀란 등에서 맹활약한 스트라이커 다니엘레 마사로다.         마사로는 당시 Valsport사의 축구화를 신었는데 모델 명은 MASSARO EV2500(12개짜리 고정식 스터드)과 MASSARO EVSC2500 (6개짜리 교환식 스터드)이었다. 검정색 가죽(방수 처리된 캥거루 가죽)에 주황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인 MASSARO EV2500(및 MASSARO EVSC2500)은 부드럽고 탄탄하면서 두터운 스폰지가 발목 및 아킬레스건을 완전히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당시 마사로의 축구화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색이 있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축구화의 모든것 All that boots    

06월19일

고정운, 나이키와 정식 계약한 1호 모델

제가 처음 신었던 축구화는 지금은 없어진 서경 축구화였어요. 부산에서 만들어진 회사였고 정말 오래된 축구화 회사였는데 없어져서 아쉽더군요. 축구화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일단 나이키가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공식 계약을 맺은 선수가 바로 저였어요. 물론 축구화를 제공받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나이키에게서 계약금을 받고 공식적으로 스폰서 계약을 맺은 경우는 없었죠. 그 당시만 해도 나이키는 축구화에 있어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아디다스 축구화의 경우는 독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거라 재질이 굉장히 좋았죠. 그래서 저 역시 나이키와 계약하기 전에는 아디다스를 신었습니다. 반면 나이키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제작된 거라 품질이 썩 좋지 않았어요. 한 번 신고 버려야 하는 축구화라 나이키에서도 한 번에 20~30켤레씩 갖다주곤 했죠.(웃음) 이후에 나이키가 축구화에 있어서도 빠르게 성장해서 아디다스 못지 않은 축구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특히 나이키나 아디다스는 최고 레벨의 선수들만 스폰서 계약을 맺기 때문에 주위 동료들이 부러워하곤 했어요. 그래서 축구화를 받으면 친한 동료들에게 축구화를 나눠주곤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축구화 스폰서를 받지 못하는 프로 선수들도 많이 있거든요.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 축구화를 많이 나눠준 기억이 납니다. 현역 시절에 제가 가장 즐겨 신었던 축구화는 머큐리얼 2.0이었어요. 호나우두가 신던 모델인데 저에게 가장 잘 맞았습니다. 저는 윙어였기 때문에 가볍고 날렵한 모델을 좋아했어요. 당시 아디다스도 조금 투박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 축구화는 최근 축구화들처럼 날렵하게 나왔었죠. 그리고 한국의 잔디 토양이 딱딱하기 때문에 스터드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고무창이 달린 것을 썼어요.

06월13일

김상식, “농구화 같은 축구화는 없을까요?”

축구 선수들이 경기를 하다 보면 발이나 복숭아 뼈 부분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발목이 꺾여서 큰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건데, 농구화처럼 발목을 덮는 축구화가 있다면 부상을 방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축구화가 발목까지 올라와도 신고 경기 하는데는 문제 없을 것 같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요. 축구화 얘기를 하니 처음 신은 축구화가 기억나네요. 4,000원~4,500원 사이에 하던 축구화였는데 브랜드도 없는 시장표 ‘짝퉁’이었어요. 그걸 신고 초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죠. 네? 설기현은 3,000원짜리였다고요? 나보다 더 어려웠네. (웃음)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감독님께서 키카 축구화를 사주셨어요. 그 당시 유명했던 축구화가 키카였는데 참 좋았죠. 중학교 때까지 키카를 신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아디다스에서 제일 싼 모델을 신게 됐죠. 이후 대학에 온 뒤 선배들로부터 하나씩 축구화를 얻어가며 신었고요. 그렇게 신다 프로에 오면서 다양한 축구화를 신었고 지금은 푸마의 킹 모델을 신고 있어요. 올해부터 푸마의 스폰서를 받고 있는데 스터드가 높으니까 좋아요. 다른 건 스터드가 얕은데 이건 높거든요. 그리고 착용감도 편한데 요즘은 워낙 축구화를 다 잘 만드니까요. 사실 제가 축구화를 가리지는 않아요. 다른 선수들은 이거 신다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걸로 바꾸고 그런데 전 적응 문제도 없이 무엇을 신든 편해요. 그래서 브랜드 같은 거 따지지 않고 발이 편하다 싶으면 신어요. 그리고 제가 축구화에 발을 맞춰버려요. 275mm를 신으면 꽉 끼고 280mm는 좀 헐거운 느낌이지만 좀 신다 보면 축구화에 발이 적응 돼버리거든요. 사람은 무엇이든 쉽게 적응되잖아요. 축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06월11일

최고급 축구화의 제1원소, 천연 가죽

캥거루 가죽 외에 소 가죽도 많이 사용된다. 소 가죽은 ‘캥거루 가죽에 비해 탄력도 떨어지고 두껍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최근에는 부쩍 좋아진 모습이다. 특히 푸마 킹XL에 쓰인 소 가죽은 웬만한 캥거루 가죽을 넘어선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캥거루 가죽은 한 종류인 반면에 소 가죽은 3종류로 나뉜다. 소의 연령과 상태에 따라 나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 카프(Calf) 소 가죽 가운데 캥거루 가죽 소재에 가장 가까운 것이 \'카프\'다. 생후 6개월 이내의 아기 소로 만든 가죽인데, 표면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면서 탄력성이 좋은 걸로 알려져 있다. * 킵(Kip) 생후 6개월~2년 정도 된 소의 가죽이다. * 스티어(Steer) 생후 3개월~6개월 이내에 거세(去勢)된 2살 이상의 수소로 만든 가죽이다.(‘Steer’의 사전적 의미는 거세우(去勢牛)) 천연 가죽 축구화의 장점은 꼽자면 신으면 신을 수록 발에 잘 맞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기성(通氣性)이 좋고, 내구성(耐久性)도 뛰어나다. 단점으로는 변형이 빨리 되고 물에 약하다는 건데, 천연 가죽 축구화를 신고 수중전을 치렀을 경우엔 이후에 정성 어린 손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잘 만 어루만져주면 나만의 축구화가 될 가능성도 커진다고 하겠다. 최근 신 소재 축구화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축구 선수들이 천연 가죽을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있다 .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6월09일

최효진에게 축구화는 곧 아버지

‘축구화’하면 아버지 얘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축구를 하는 내내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제 위로 누님 두 분이 계시는데, 외아들이어서인지 아버지가 제게 쏟는 정성과 기대가 크셨던 것 같아요. 항상 남들보다 더 좋은 축구용품을 챙겨주셨죠.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어요. 처음 신었던 축구화 브랜드는 ‘리복’이었고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체육사에서 ‘키카’를 사 신었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고가의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하지만 리복 축구화는 처음 신은 후로는 다시 안 사게 됐어요. 축구화 전문 브랜드가 아니어서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나중에는 친구들과 똑같이 체육사에서 키카를 사 신었죠. 어렸을 때부터 축구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새 축구화를 보면 그렇게 갖고 싶을 수가 없더라고요. 새 축구화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를 조르곤 했어요. 그런데 정말 좋은 축구화는 성인용(250mm 이상)만 나오거든요. 저는 중학교 때까지 발이 작은 편이었어요. 그러니 새 축구화를 사도 실제로 신고 뛸 수는 없었던 거죠. 집에 ‘모셔놓기만’ 했던 축구화가 몇 켤레 됐어요. 그래도 아들이 새 축구화를 보면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하니까 아버지가 못이기는 척 사 주셨죠. 그때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훈련이 없는 주말마다 집(파주)에 가면 ‘전시용’ 축구화들을 신어보고 발이 얼마나 컸는지 확인했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한 번 선택한 축구화를 계속 신는 스타일이에요. 지금 신고 있는 축구화는 나이키 베이퍼예요. 신었을 때 발이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있는 축구화를 좋아해요. 축구화 중에서도 내 발이랑 딱 하나가 되는 느낌인 게 있거든요. 베이퍼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축구화가 아니어서(편집자 주- 나이키 스킨으로 제작) 잘 늘어나지 않아요. 축구화가 늘어나거나 발 모양에 따라 변형되면 금방 바꿔야 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좋죠. 코팅처리가 돼 있는 것도 장점인 것 같아요. 비가 와도 축구화 속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으니 직접 신고 뛰는 입장에서 좋아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니 환경에 따라서도 축구화에 대한 기억이 달라지네요. 예전에 맨땅이나 효창운동장(인조구장)에서 뛸 때는 축구화 ‘코’가 자주 벗겨졌던 것 같은데, 요즘은 더 이상 그럴 일이 없잖아요. 그때는 슈팅을 자주 하면 축구화 앞 부분 가죽이 다 벗겨지고 구멍이 나기도 했거든요. 구두약으로 색깔을 덧칠하기도 하고 구멍 난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놓기도 했죠. 지금은 축구화들이 워낙 좋게 만들어지는데다 잔디에서 축구를 하니까 뽕이 닳지도 않고 코가 빠지는 일도 없죠. 축구화가 가벼워진 것도 좋고요. 하지만 이 이상 가벼워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06월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