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일지도 모른다!”
1994년 여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프레데터 축구화가 발매됐을 때 아디다스는 조금은 공격적인 광고 문구를 사용했다.
"그 이름은 Predator(약탈자). 마치 상어의 이빨을 연상케 하는 ‘Fin+Jet 구조‘의 혁신적인 어퍼(upper)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온다. 볼 스피드 10%와 볼 컨트롤 능력을 10% 증가시켰고, 볼의 회전율도 20%를 증가시켰다. 상대는 골을 허용 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이 운 좋게 프레데터를 손에 넣어, 슛 찬스를 잡게 된다면 동료들과 서포터들에게 공포에 가까운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이전까지 축구화, 더 나아가 스포츠 용품 광고 문구 및 설명이 이토록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아디다스가 프레데터에 거는 기대는 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시중에서의 반응은 싸늘했다. 선수들과 축구팬들은 프레데터에 관심을 갖긴 했지만 구입을 꺼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초의 프레데터 축구화는 현재의 모델과는 달리 프레데터 러버가 인스텝 부분 전면에 부착이 돼 있었기 때문에 무게가 대단히 무거웠다. 축구화 한짝의 무게가 무려 400그램이 넘었다.
“그렇게 무거운 축구화를 누구 신겠나!“
당시 아디다스사 내에서도 이와 같은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후문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프레데터 축구화를 착용한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독일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프레데터를 신은 선수는 극소수에 불구했다. 독일 선수들 대부분 기존의 ‘코파문디알’과 ‘월드컵’ 그리고 프레데터와 같은 시기에 출시된 ‘퀘스트라(Questra)’를 착용했다. 프리킥 전문 키커인 토마스 헤슬러조차 프레데터가 아닌 퀘스트라를 신고 뛰었다. 초대 프레데터는 한마디로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아디다스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아디다스사 내에는 창시자인 아돌프 다슬러의 “월드컵과 올림픽은 연구의 장소다”라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초대 프레데터는 실패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아디다스는 프레데터를 착용한 선수들에게 많은 조언을 들어가며 1995년과 1996년에 연속으로 프레데터 후속 모델을 출시하면서 진화를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