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일본 대표팀 주장이자 아시아 최고 수준의 리베로 나카자와 유우지(中澤 佑二)는 1996년 리미츠사토 공업기술 고등학교 졸업 후,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FC아메리카 클럽에 입단한 나카자와는 공식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연습 경기에만 출전했는데 이듬 해 무릎 부상을 크게 당하면서 결국 1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FC아메리카 클럽 시절 나카자와는 동료 선수들에게 “축구도 못하는 놈이 축구화는 비싸고 좋은 걸 신고 뛴다!“는 비아냥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은 어린 선수들도 값비싼 해외 유명 브랜드 축구화를 즐겨 신는다. 하지만 일본 선수들이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과거 한국 선수들이 정신(正信), 서경(西京), 키카(KIKA) 등 국산 축구화를 애용했듯이 일본 선수들도 ‘야스다(YASUDA)’라는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야스다는 일본제 축구화 제 1호로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축구 전문 브랜드다.
야스다 축구화는 아디다스, 푸마 등의 축구화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면서 질도 좋았기 때문에 특히 중,고등학교 선수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1990년대 일본 축구계를 대표했던 이하라 마사미, 키타자와 츠요시, 나카야마 마사시 등도 고등학교 시절 야스다 축구화의 열렬한 애용자였다. 최근에는 아디다스-나이키-푸마-미즈노-아식스 등 세계적 브랜드에 밀려 존재감이 사라졌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야스다 축구화의 인지도는 일본 국내에서 만큼은 꽤 높은 편이었다.
야스다(YASUDA)는 1932년 야스다 시게하루라고 하는 21살의 젊은이에 의해서 창업됐다.
그 무렵 야스다 축구화의 주고객은 게이오, 와세다, 메이지 등 도쿄에 있는 대학 축구부원들이었다. 당시부터 야스다는 판매 후, 축구화 장인들이 각 학교를 돌며 선수들의 축구화를 수선해 주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실시했다. 이러한 탁월한 서비스 정신으로 야스다 축구화는 도쿄를 넘어 일본 전역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대표팀이 출전했다. 당시 일본 대표팀은 도쿄 대학과 와세다 대학 선수들 위주로 구성이 됐는데 이들이 신고 있던 축구화는 다름아닌 야스다 제품이었다.
1952년 ‘주식회사 야스다’가 설립됐고 1960년부터는 일본 최초로 밑 창이 고무로 된 축구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67년에는 수년 간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축구공 ‘일레븐 스타즈’가 일본 축구 협회로부터 공인구로 인정받으면서 야스다는 일본 최고의 축구 전문 브랜드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야스다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일본 축구 대표팀 기술고문을 역임한 독일의 명장 데트마르 크라머로부터 당시에 축구화에 관한 많은 조언을 들었고 1973년에는 브라질의 축구 스타 자일징요(1970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와 어드바이서 계약을 맺기도 했다.
야스다는 1988년에 회사명을 CLIX YASUDA(클릭스 야스다)로 바꾸면서 규모를 더욱 늘렸다. 그러나 1993년 일본 J리그 창설과 동시에 일본에 축구 붐이 일어나면서 나이 어린 학생 선수들까지 아디다스-나이키-푸마-미즈노-아식스 등 세계적 유명 브랜드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입지가 좁아진 야스다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전후로 판매 실적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결국 파산 신청을 내고 말았다. 야스다는 2007년 유니폼 생산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는데 그 결과가 주목된다.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 가운데 야스다 축구화를 착용한 선수는 현 브라질 대표팀 감독인 둥가였다. 둥가는 현역 때인 1995~1998년 J리그 주빌로 이와타 시절 야스다 축구화를 애용했다. 축구화에 몹시 민감한 걸로 알려진 둥가는 당시 야스다 측에 뒤꿈치 부분의 가죽을 2mm 정도 낮게 해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