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증, 나이키 축구화의 선구자
1980년대 초, 국내에 나이키가 상륙하면서 스포츠 용품 특히 스포츠화 부문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고급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던 터라 나이키 운동화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TV에서는 연일 “나이키는 누가 신는가! 마라톤의 알베르토 살라자르! 테니스의 존 메켄로!\"라는 강하고 멋진 멘트의 광고를 내보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시 일반 운동화 가격이 2~3.000원, 비싼 게 4~5.000원 정도였는데 나이키 조깅화는 12.000원, 테니스화 및 농구화는 22.000원이었다. 당시로서는 가계(家計)에도 부담이 되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지갑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질 좋고 값비싼\'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자랑을 넘어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국산 프로스팩스도 등장하면서 나이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는데 나이키가 한발 앞서 나갔다.
1983년부터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자 나이키 열풍은 더욱 강해졌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나이키 운동화 붐이 일어났고, 급기야 각 학교에 ‘나이키 도둑놈’까지 출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난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이키는 분명 최고급 스포츠 메이커였지만 육상-테니스-농구 종목에 한정됐고, 축구 쪽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당시엔 유럽-남미 선수들 조차 나이키 축구화를 신지 않았으니까.
나이키 축구화가 본격적으로(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게된 건 90년대 초,중반부터인데 94년 미국 월드컵을 전후에서 많은 선수들이 나이키 축구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호마리오-베베토 투톱을 비롯한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미국 월드컵 때 나이키 축구화를 신었다.
얼마 전, 올댓부츠 기사를 보니 국내 축구 선수 가운데 나이키와 가장 먼저 계약을 한 인물이 고정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내 선수 가운데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의 기억으로는 조영증(현 파주 트레이닝센터장)이다.
조영증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스위퍼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81년 미국 프로 리그로 진출해 포틀랜드-시카고를 거치며 3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 후 84년에 국내 프로 리그로 복귀해 럭키 금성(현 FC서울)에 입단을 했는데 당시 조영증이 국내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 무렵 국내 성인 선수들 대부분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제품을 많이 신었기 때문에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했다. 당시 조영증이 신었던 축구화는 윤기나는 검정색 가죽에 흰색 나이키 마크가 새겨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프로 축구 초창기 때는 인조 잔디가 깔려있는 효창구장에서도 몇 차례 프로 경기가 벌어졌는데 특히 효창구장에서의 야간 경기 때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
럭키 금성은 프로 축구 창설 이듬 해인 84년부터 리그에 참가했는데 할렐루야-대우 못지않게 멤버가 화려했다. 박세학 감독이 이끄는 럭키 금성은 GK 김현태를 비롯해 조영증-한문배-정해성-권오손-박항서-이용수-강득수-피아퐁 등 수준급 선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조영증은 한문배-정해성-권오손 등과 함께 막강 수비진을 구축했는데 84년 리그에선 자주 센터포워드로 기용돼 28게임/9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박세학 감독은 팀에 무게감 있는 센터포워드가 없자 체격이 좋은 조영증을 센터포워드로 전격 기용해 큰 효과를 봤다.
조영증은 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도 몇 차례 센터포워드로 기용된 적이 있다. 85년 시즌에 럭키 금성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때는 조영증이 월드컵 대표팀에 차출돼 국내 리그엔 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80년대 초, 대표팀 주장도 역임했던 조영증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불가리아-이탈리아전에 풀타임 출전했고,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도 멋진 활약을 펼치며 한국이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신장 178cm의 육중한 체격인 조영증은 별명이 ‘히프’였는데 힘이 장사여서 유럽 공격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조영증은 부족한 스피드를 두뇌 플레이로 커버하는 지능적인 스위퍼였다. 70년대 말, 대표팀에서 조영증과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박성화(스토퍼)는 1년 선배인 조영증을 \'영리한 수비수\'라고 극찬한다. 조영증의 현역 시절 백넘버는 8번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7월27일
옛 선수들의 벗 아식스
나이키-프로스팩스 등이 등장(1981년 경)하기 전까지 국내에는 질 좋은 가죽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전문 스포츠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인 운동 선수들의 경우엔 어쩔 수없이 아디다스, 아식스, 미즈노 등의 값비싼 외국 제품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국내 성인 선수들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참고: 미즈노는 1980년대 초까지 모렐리아 라인을 생산하지 않았다.)
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디다스와 아식스에서 유니폼을 비롯한 용품을 후원 받은 듯한데 특히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대표팀 유니폼, 스타킹, 축구화 모두 아식스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인 할렐루야는 창단 때부터 유니폼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아식스 제품이었다.(할렐루야도 아식스사로부터 후원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할렐루야 제 1 유니폼이 상의가 노란색, 하의가 남색, 스타킹이 노란 색이었는데 선수들 축구화도 검정색 가죽에 노란색 라인이 그어진 제품이었던 터라 마치 유니폼과 축구화가 한 세트처럼 보였다. 흰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를 신은 선수도 몇 명 있었지만 노란색 라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서 활약하는 김주성이 아디다스 축구화, 일본 J리그 산프라체 히로시마에서 뛰는 노정윤이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은 아식스 축구화를 신었다. 이렇듯 우리 선수들은 과거부터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아식스 축구화를 애용한 이가 현 전북 현대 감독인 최강희다. 최강희는 이에 대해 얼마 전, [올댓부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우신고 출신인 최강희는 83년 포철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이듬 해인 84년 현대로 이적해 92년까지 부동의 오른 쪽 사이드백으로 활약하며 프로 통산 207경기에 출장했다. 28세 때인 88년에 늦각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최강희는 서울 올림픽과 같은 해 12월 카타르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 2년 후인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경기 모두 주전으로 풀타임 활약했다.
90년 월드컵 당시, 신예 황선홍과 수비수 박경훈이 프로스팩스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최강희는 3경기 모두 아식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최강희는 축구화 끈을 매고난 뒤, 그 위에 흰색 테이프(반창고)를 발등에서 발바닥 쪽으로 몇 차례 칭칭 감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대기만성의 표본인 최강희는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구력을 자랑한 수비수였는데 그는 현역 시절을 아식스 축구화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뇌리에는 지금도 \'최강희=아식스 축구화, 아식스 축구화=최강희\'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같은 시기, 최강희 외에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선수가 최인영 골키퍼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현재 전북 현대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조만간, 이 코너에서 아식스사의 역사 및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세계적 선수들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한다.
덧.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남-북 대결에서의 차범근 모습을 보면 축구화 뿐 아니라 유니폼, 스타킹 모두 아식스 제품인 걸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세 줄이 그어진 아디다스 유니폼 갖지만 두 줄이 그어진 아식스 유니폼이다. 당시 아식스는 한 줄은 굵고, 한 줄은 가느다란 디자인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6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