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수들의 벗 아식스
나이키-프로스팩스 등이 등장(1981년 경)하기 전까지 국내에는 질 좋은 가죽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전문 스포츠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인 운동 선수들의 경우엔 어쩔 수없이 아디다스, 아식스, 미즈노 등의 값비싼 외국 제품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국내 성인 선수들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참고: 미즈노는 1980년대 초까지 모렐리아 라인을 생산하지 않았다.)
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디다스와 아식스에서 유니폼을 비롯한 용품을 후원 받은 듯한데 특히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대표팀 유니폼, 스타킹, 축구화 모두 아식스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인 할렐루야는 창단 때부터 유니폼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아식스 제품이었다.(할렐루야도 아식스사로부터 후원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할렐루야 제 1 유니폼이 상의가 노란색, 하의가 남색, 스타킹이 노란 색이었는데 선수들 축구화도 검정색 가죽에 노란색 라인이 그어진 제품이었던 터라 마치 유니폼과 축구화가 한 세트처럼 보였다. 흰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를 신은 선수도 몇 명 있었지만 노란색 라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서 활약하는 김주성이 아디다스 축구화, 일본 J리그 산프라체 히로시마에서 뛰는 노정윤이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은 아식스 축구화를 신었다. 이렇듯 우리 선수들은 과거부터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아식스 축구화를 애용한 이가 현 전북 현대 감독인 최강희다. 최강희는 이에 대해 얼마 전, [올댓부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우신고 출신인 최강희는 83년 포철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이듬 해인 84년 현대로 이적해 92년까지 부동의 오른 쪽 사이드백으로 활약하며 프로 통산 207경기에 출장했다. 28세 때인 88년에 늦각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최강희는 서울 올림픽과 같은 해 12월 카타르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 2년 후인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경기 모두 주전으로 풀타임 활약했다.
90년 월드컵 당시, 신예 황선홍과 수비수 박경훈이 프로스팩스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최강희는 3경기 모두 아식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최강희는 축구화 끈을 매고난 뒤, 그 위에 흰색 테이프(반창고)를 발등에서 발바닥 쪽으로 몇 차례 칭칭 감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대기만성의 표본인 최강희는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구력을 자랑한 수비수였는데 그는 현역 시절을 아식스 축구화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뇌리에는 지금도 \'최강희=아식스 축구화, 아식스 축구화=최강희\'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같은 시기, 최강희 외에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선수가 최인영 골키퍼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현재 전북 현대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조만간, 이 코너에서 아식스사의 역사 및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세계적 선수들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한다.
덧.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남-북 대결에서의 차범근 모습을 보면 축구화 뿐 아니라 유니폼, 스타킹 모두 아식스 제품인 걸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세 줄이 그어진 아디다스 유니폼 갖지만 두 줄이 그어진 아식스 유니폼이다. 당시 아식스는 한 줄은 굵고, 한 줄은 가느다란 디자인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축구용품업계 최강자, (주)카포 곽중철 대표
곽중철 대표는 축구용품을 전국에 공급하며 연 매출 250억 원을 올리는 국내 축구용품업계의 선두주자다. 그러나 곽 대표의 성공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국내 신발산업이 호황일 때 축구화 제조의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본 야스다스포츠의 축구용품을 OEM 방식으로 제작했었는데, 점차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로 마음 먹었다. 길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80년대 말 유소년 축구팀 단장 자격으로 일본을 찾은 곽 대표는,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찾았고 여기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었기 때문에 국내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를 위해 외국에 나가면 축구용품을 한 보따리씩 구입해 입국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방문했죠. 그때만해도 국산 축구화는 KIKA 제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축구화가 없었어요. 반면, 일본 축구화 시장은 아디다스, 푸마, 미즈노, 아식스 등 메이커 선택의 폭이 참 넓고 품질도 좋더라고요. 특히 많은 애들이 고민 끝에 국산 축구화의 몇 배가 넘는 선수용 축구화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다양하고 질 좋은 축구용품에 목마른 국내 축구인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축구용품 멀티샵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90년 동대문운동장에 한국 최초의 축구용품 전문샵을 오픈 했지만 출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단 유명 메이커 상품을 취급하고 싶어도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곽 대표는 성공의 걸음마를 같이 할 파트너를 사방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이때 1990년 중반부터 축구용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나이키가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쌓은 30여 년의 기술력과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축구용품 유통 사업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축구 용품의 황무지인 우리나라에 새로운 낙원을 만들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몇몇 메이커의 직영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많은 고민 끝에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파트너로 당시 축구화 시장에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던 나이키를 점 찍었고 오랜 권유 끝에 마침내 그들과 손을 잡게 됐죠. 나이키 역시 기존의 방식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유통 방식으로 시장 개척에 나서려고 하는 마음이 컸어요. 결국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게 됐습니다.” 곽 대표의 전략이 주효하자 다른 유명 브랜드들도 자연스레 곽 대표의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축구용품을 수주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 곽 대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매장 일일 평균 방문객이 3,000여명에 달했을 정도로 축구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축구용품업체로서는 최초로 B2B 인터넷 주문 시스템 개설과 업계 최대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EPR 시스템 구축을 통해 K-리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리그 정보와 각종 제품을 국내 시장에 선보이는 등 선진 축구문화 보급의 화수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축구 마니아의 지상천국인 일본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최근 우리나라도 점차 보는 축구에서 직접 즐기고 느끼는 축구로 탈바꿈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어요.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매력적인 축구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실제 전문화된 스포츠 카테고리를 만끽할 수 있는 멀티용품숍의 매력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보면서 국내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 축구화 프로모션을 위해 저희 카포스포츠 매장을 찾은 호나우지뉴마저 잠시 중력을 잃고 쇼핑의 매력에 빠졌을 정도니까요. (웃음)”
그러나 곽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적 경제한파 속에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10년 후를 대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곽 대표는 현재 위치가 미래의 경쟁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친다. 현재 국내 축구유통업계 최초로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곽 대표는 앞으로 수익 창출 사업뿐만 아니라 선진 축구 문화의 정착과 유소년 축구 육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자구적인 노력을 통해 카포스포츠를 한국 축구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 동안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초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등 많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선진화된 축구 인프라 구축에는 미흡한 점이 많고 자성의 목소리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는 한국 축구의 발전이 없다면 카포스포츠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요구 속에 축구업계의 선두주자인 카포스포츠의 사회적인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카포스포츠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축구 협회와 프로구단 등과 연계해 유소년 축구 육성 프로그램, 용품 지원 등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향후 몇 년간 폭 넓은 투자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정말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제게 있어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며 그 기대와 믿음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제 의무이자 책임이니까요.
05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