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형이 SG 축구화를 꺼리는 이유는?

축구화를 고를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바로 안정감이에요. 그동안 나이키 스폰서를 받으면서 Total 90 시리즈를 줄곧 애용했죠. 최근에는 티엠포 레전드 시리즈를 신고 있어요. 특히 티엠포 레전드 3는 기존의 티엠포 시리즈와 달리 발을 잘 잡아준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일단 제 포지션이 격렬한 움직임과 많은 방향 전환을 소화해야하는 수비수이기 때문에 티엠포 레전드 3처럼 착화감이 좋은 축구화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게 사실이에요. 축구화 선택에 있어 한 가지 특이한 취향이 있다면 저는 일명 \'쇠뽕\'이라고 불리는 SG 축구화를 절대 신지 않아요. 많은 수비수들이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기 위해 잔디와의 마찰력이 높은 SG 축구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한국 잔디는 거칠고 이미 바닥의 마찰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스터드가 지면에 깊이 박힐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스터드 높이가 비교적 낮고 재질이 가벼운 FG 축구화를 즐겨 신어요. 부상 위험도 상대적으로 적은 점도 무시할 수 없죠.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모델만 신는 것은 아니에요. 날씨도 축구화 선택에 영향을 미치죠. 맑은 날씨에는 티엠포 레전드 3처럼 원통형 스터드 축구화를 즐겨 신어요. 그러나 한국의 짧고 거친 잔디도 비가 오면 물기 때문에 마찰력이 감소해 더 미끄럽고, 비가 오고 난 직후에는 천연잔디의 마찰력이 인조잔디보다 크기 때문에 수중전에는 마치 굵은 스터들 신은 것처럼 회전력을 높일 수 있는 막대형 스터드 축구화도 준비해 놓죠. 실제 프로 선수라면 경기하는 동안의 날씨와 그라운드 환경을 고려해 여러 축구화를 골라 신곤 해요.

05월18일

옛 선수들의 벗 아식스

나이키-프로스팩스 등이 등장(1981년 경)하기 전까지 국내에는 질 좋은 가죽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전문 스포츠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인 운동 선수들의 경우엔 어쩔 수없이 아디다스, 아식스, 미즈노 등의 값비싼 외국 제품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국내 성인 선수들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참고: 미즈노는 1980년대 초까지 모렐리아 라인을 생산하지 않았다.) 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디다스와 아식스에서 유니폼을 비롯한 용품을 후원 받은 듯한데 특히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대표팀 유니폼, 스타킹, 축구화 모두 아식스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인 할렐루야는 창단 때부터 유니폼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아식스 제품이었다.(할렐루야도 아식스사로부터 후원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할렐루야 제 1 유니폼이 상의가 노란색, 하의가 남색, 스타킹이 노란 색이었는데 선수들 축구화도 검정색 가죽에 노란색 라인이 그어진 제품이었던 터라 마치 유니폼과 축구화가 한 세트처럼 보였다. 흰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를 신은 선수도 몇 명 있었지만 노란색 라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서 활약하는 김주성이 아디다스 축구화, 일본 J리그 산프라체 히로시마에서 뛰는 노정윤이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은 아식스 축구화를 신었다. 이렇듯 우리 선수들은 과거부터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아식스 축구화를 애용한 이가 현 전북 현대 감독인 최강희다. 최강희는 이에 대해 얼마 전, [올댓부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우신고 출신인 최강희는 83년 포철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이듬 해인 84년 현대로 이적해 92년까지 부동의 오른 쪽 사이드백으로 활약하며 프로 통산 207경기에 출장했다. 28세 때인 88년에 늦각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최강희는 서울 올림픽과 같은 해 12월 카타르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 2년 후인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경기 모두 주전으로 풀타임 활약했다. 90년 월드컵 당시, 신예 황선홍과 수비수 박경훈이 프로스팩스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최강희는 3경기 모두 아식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최강희는 축구화 끈을 매고난 뒤, 그 위에 흰색 테이프(반창고)를 발등에서 발바닥 쪽으로 몇 차례 칭칭 감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대기만성의 표본인 최강희는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구력을 자랑한 수비수였는데 그는 현역 시절을 아식스 축구화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뇌리에는 지금도 \'최강희=아식스 축구화, 아식스 축구화=최강희\'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같은 시기, 최강희 외에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선수가 최인영 골키퍼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현재 전북 현대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조만간, 이 코너에서 아식스사의 역사 및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세계적 선수들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한다. 덧.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남-북 대결에서의 차범근 모습을 보면 축구화 뿐 아니라 유니폼, 스타킹 모두 아식스 제품인 걸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세 줄이 그어진 아디다스 유니폼 갖지만 두 줄이 그어진 아식스 유니폼이다. 당시 아식스는 한 줄은 굵고, 한 줄은 가느다란 디자인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어린 황선홍의 소중한 축구화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지가 사 주신 첫 축구화는 ‘자가’라는 시장표 축구화였어요. 우리끼리는 ‘짜가’라고도 불렀던 축구화죠. 그 당시에는 남자 아이들 사이에 축구화를 신고 등, 하교 하는 게 유행 같은 거였어요. 길 위에서 ‘따각따각’ 소리를 내면서 걸으면 괜히 우쭐해지는 느낌 있죠? 일종의 특권의식 같은 거였어요. 그땐 축구화를 정말 소중하게 다뤘어요. 축구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온 뒤에는 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다 털어내고 걸레로 깨끗이 닦아서 머리맡에 두고 잤을 정도죠. 나중에는 어른들이 축구화에서 냄새 난다고, 바깥에 두라고 하셨지만요.(웃음) 축구부에서 처음 받았던 운동화는 서경 축구화였어요. 선수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인기 있었던 브랜드죠. 코가 닳아서 매직 같은 것으로 새까맣게 칠하기도 하고, 검정색 테이프로 붙였던 기억이 나네요. 선수 생활 중에 가장 애착이 갔던 축구화는 95년도에 신었던 나이키 축구화예요. K리그에서 8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던 당시에 신었던 축구화인데, 골 감각이 워낙 좋으니까 다른 축구화로 쉽게 갈아 신지 못했어요. 공격수들은 특히 그런 징크스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두 경기 신었던 축구화는 늘어나서 금방 갈아주는 게 예사였는데,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축구화예요. 나중에는 앞쪽에 구멍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도 계속 골이 들어가니까 테이프를 붙여 신고 뛰기도 했어요. 수많은 축구화 중에 지금까지 갖고 있는 건 2002 월드컵 때 신었던 나이키 에어줌 토탈 90 축구화예요.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 신었던 축구화죠. 가볍고 편한 느낌의 축구화여서 좋아했는데,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던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 당시 월드컵 대표팀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과 함께 개인 소장하고 있는, 현역 시절의 거의 유일한 축구용품이랍니다.

05월18일

축구용품업계 최강자, (주)카포 곽중철 대표

곽중철 대표는 축구용품을 전국에 공급하며 연 매출 250억 원을 올리는 국내 축구용품업계의 선두주자다. 그러나 곽 대표의 성공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국내 신발산업이 호황일 때 축구화 제조의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본 야스다스포츠의 축구용품을 OEM 방식으로 제작했었는데, 점차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로 마음 먹었다. 길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80년대 말 유소년 축구팀 단장 자격으로 일본을 찾은 곽 대표는,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찾았고 여기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었기 때문에 국내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를 위해 외국에 나가면 축구용품을 한 보따리씩 구입해 입국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방문했죠. 그때만해도 국산 축구화는 KIKA 제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축구화가 없었어요. 반면, 일본 축구화 시장은 아디다스, 푸마, 미즈노, 아식스 등 메이커 선택의 폭이 참 넓고 품질도 좋더라고요. 특히 많은 애들이 고민 끝에 국산 축구화의 몇 배가 넘는 선수용 축구화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다양하고 질 좋은 축구용품에 목마른 국내 축구인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축구용품 멀티샵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90년 동대문운동장에 한국 최초의 축구용품 전문샵을 오픈 했지만 출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단 유명 메이커 상품을 취급하고 싶어도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곽 대표는 성공의 걸음마를 같이 할 파트너를 사방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이때 1990년 중반부터 축구용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나이키가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쌓은 30여 년의 기술력과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축구용품 유통 사업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축구 용품의 황무지인 우리나라에 새로운 낙원을 만들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몇몇 메이커의 직영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많은 고민 끝에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파트너로 당시 축구화 시장에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던 나이키를 점 찍었고 오랜 권유 끝에 마침내 그들과 손을 잡게 됐죠. 나이키 역시 기존의 방식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유통 방식으로 시장 개척에 나서려고 하는 마음이 컸어요. 결국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게 됐습니다.” 곽 대표의 전략이 주효하자 다른 유명 브랜드들도 자연스레 곽 대표의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축구용품을 수주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 곽 대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매장 일일 평균 방문객이 3,000여명에 달했을 정도로 축구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축구용품업체로서는 최초로 B2B 인터넷 주문 시스템 개설과 업계 최대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EPR 시스템 구축을 통해 K-리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리그 정보와 각종 제품을 국내 시장에 선보이는 등 선진 축구문화 보급의 화수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축구 마니아의 지상천국인 일본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최근 우리나라도 점차 보는 축구에서 직접 즐기고 느끼는 축구로 탈바꿈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어요.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매력적인 축구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실제 전문화된 스포츠 카테고리를 만끽할 수 있는 멀티용품숍의 매력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보면서 국내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 축구화 프로모션을 위해 저희 카포스포츠 매장을 찾은 호나우지뉴마저 잠시 중력을 잃고 쇼핑의 매력에 빠졌을 정도니까요. (웃음)” 그러나 곽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적 경제한파 속에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10년 후를 대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곽 대표는 현재 위치가 미래의 경쟁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친다. 현재 국내 축구유통업계 최초로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곽 대표는 앞으로 수익 창출 사업뿐만 아니라 선진 축구 문화의 정착과 유소년 축구 육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자구적인 노력을 통해 카포스포츠를 한국 축구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 동안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초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등 많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선진화된 축구 인프라 구축에는 미흡한 점이 많고 자성의 목소리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는 한국 축구의 발전이 없다면 카포스포츠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요구 속에 축구업계의 선두주자인 카포스포츠의 사회적인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카포스포츠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축구 협회와 프로구단 등과 연계해 유소년 축구 육성 프로그램, 용품 지원 등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향후 몇 년간 폭 넓은 투자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정말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제게 있어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며 그 기대와 믿음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제 의무이자 책임이니까요.

05월18일

발목있는 축구화의 원조는 '판 바스텐'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맟추어 출시된 '발목 있는' 축구화인 머큐리얼 슈퍼플라이 4를 선두로 아디다스와 푸마에서 발목있는 축구화를 이미 출시했거나 곧 출시할 예정이다. 최근 많은 선수들이 착용하고 있는 '발목 있는' 축구화의 시작이 머큐리얼 슈퍼플라이 4의 출시년도인 2014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초에 발목을 감싸는 축구화 즉, '농구화 같은 축구화'를 신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 바스턴이다. 판 바스턴은 역대 세계 최고의 센터포워드 아니던가! 그가 어느 정도로 위대한 공격수였는지는 현역 시절 우승 및 개인상 수상 경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82,84,85년 네덜란드 리그 우승(아약스) 84-87시즌 4년 연속 득점왕(아약스) 87-88시즌 SERIE-A 우승(AC밀란) EURO88 우승(대회 MVP 및 득점왕(5골)) 88-89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89년 도요타컵 우승(AC밀란) 89-90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90년 도요타컵 우승(AC밀란) 91-92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2-93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3-94시즌 SERIE-A 우승(AC밀란) 89-90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91-92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88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88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89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FIFA 선정) 92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A매치 기록: 58시합/24골(네덜란드 역대 2위)       이처럼 판 바스턴의 현역 시절 경력은 화려함을 넘어 빛이 난다. 그러나 그는 현역 생활 동안 늘 부상에 시달렸다. 판 바스턴의 대표적인 부상 일지는 다음과 같다. - 아약스 시절 - 86년 오른쪽 발목 부상 후, 수술 87년 왼쪽 발목 부상(전치 2개월) - AC밀란 시절 - 87년 오른쪽 발목 부상(전치 12개월) 92년 왼쪽 발목 부상(철심을 박는 수술) 93년 5월 오른쪽 발목 부상(벨기에에서 수술) 판 바스턴의 부상 부위는 대부분 발목이었다. 축구 선수들이 발목 부상 을 많이 당하긴 하지만 판 바스턴처럼 발목 한군 데만 집중적으로 그것도 여러 차례나 다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판 바스턴이 발목을 감싸는 축구화를 신기 시작한 것은 92년 경이었다. 그 해, 왼쪽 발목에 재차 심한 부상을 당한 판 바스턴은 발목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이 부상을 계기로 당시 판 바스턴을 후원하는 이탈리아의 DIADORA사에서 그를 위해 발목을 감싸는 ‘농구화 형태의 축구화’를 특별히 제작했다.           축구화 모델 명은 Super goal. 판 바스턴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델 명이었다. 당시 DIADORA사에서 제작한 Super goal은 캥거루 가죽을 소재로 한 검정색 축구화였는데 발목 및 복숭아뼈를 완전히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발목과 복숭아뼈를 감싸는 부분은 가죽이 아닌 부드러우면서 탄탄하고 신축성있는 스폰지 소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목을 사용하는데(움직이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Super goal 축구화는 판 바스턴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모델이었던 만큼 대량 생산은 되지 않았다. 현재 Ebay에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판 바스턴은 93년 5월 프랑스 마르세유와의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또다시 오른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이 부상으로 인해 판 바스턴은 벨기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결과가 매우 좋아 94년 미국 월드컵 출전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의외로 회복 기간이 길어졌고, 결국 정상 컨디션을 되찾지 못하면서 95년 8월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 때 판 바스턴의 나이 만 30세. 절정의 기량을 뽐낼 나이였다. 그의 조기 은퇴는 본인은 물론 더 나아가 세계 축구계의 비극이기도 했다 판 바스턴 외에 발목을 감싼 축구화를 신었던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는 9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과 AC밀란 등에서 맹활약한 스트라이커 다니엘레 마사로다.         마사로는 당시 Valsport사의 축구화를 신었는데 모델 명은 MASSARO EV2500(12개짜리 고정식 스터드)과 MASSARO EVSC2500 (6개짜리 교환식 스터드)이었다. 검정색 가죽(방수 처리된 캥거루 가죽)에 주황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인 MASSARO EV2500(및 MASSARO EVSC2500)은 부드럽고 탄탄하면서 두터운 스폰지가 발목 및 아킬레스건을 완전히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당시 마사로의 축구화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색이 있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축구화의 모든것 All that boots    

05월18일

고정운, 나이키와 정식 계약한 1호 모델

제가 처음 신었던 축구화는 지금은 없어진 서경 축구화였어요. 부산에서 만들어진 회사였고 정말 오래된 축구화 회사였는데 없어져서 아쉽더군요. 축구화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일단 나이키가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공식 계약을 맺은 선수가 바로 저였어요. 물론 축구화를 제공받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나이키에게서 계약금을 받고 공식적으로 스폰서 계약을 맺은 경우는 없었죠. 그 당시만 해도 나이키는 축구화에 있어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아디다스 축구화의 경우는 독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거라 재질이 굉장히 좋았죠. 그래서 저 역시 나이키와 계약하기 전에는 아디다스를 신었습니다. 반면 나이키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제작된 거라 품질이 썩 좋지 않았어요. 한 번 신고 버려야 하는 축구화라 나이키에서도 한 번에 20~30켤레씩 갖다주곤 했죠.(웃음) 이후에 나이키가 축구화에 있어서도 빠르게 성장해서 아디다스 못지 않은 축구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특히 나이키나 아디다스는 최고 레벨의 선수들만 스폰서 계약을 맺기 때문에 주위 동료들이 부러워하곤 했어요. 그래서 축구화를 받으면 친한 동료들에게 축구화를 나눠주곤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축구화 스폰서를 받지 못하는 프로 선수들도 많이 있거든요.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 축구화를 많이 나눠준 기억이 납니다. 현역 시절에 제가 가장 즐겨 신었던 축구화는 머큐리얼 2.0이었어요. 호나우두가 신던 모델인데 저에게 가장 잘 맞았습니다. 저는 윙어였기 때문에 가볍고 날렵한 모델을 좋아했어요. 당시 아디다스도 조금 투박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 축구화는 최근 축구화들처럼 날렵하게 나왔었죠. 그리고 한국의 잔디 토양이 딱딱하기 때문에 스터드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고무창이 달린 것을 썼어요.

05월18일

김상식, “농구화 같은 축구화는 없을까요?”

축구 선수들이 경기를 하다 보면 발이나 복숭아 뼈 부분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발목이 꺾여서 큰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건데, 농구화처럼 발목을 덮는 축구화가 있다면 부상을 방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축구화가 발목까지 올라와도 신고 경기 하는데는 문제 없을 것 같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요. 축구화 얘기를 하니 처음 신은 축구화가 기억나네요. 4,000원~4,500원 사이에 하던 축구화였는데 브랜드도 없는 시장표 ‘짝퉁’이었어요. 그걸 신고 초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죠. 네? 설기현은 3,000원짜리였다고요? 나보다 더 어려웠네. (웃음)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감독님께서 키카 축구화를 사주셨어요. 그 당시 유명했던 축구화가 키카였는데 참 좋았죠. 중학교 때까지 키카를 신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아디다스에서 제일 싼 모델을 신게 됐죠. 이후 대학에 온 뒤 선배들로부터 하나씩 축구화를 얻어가며 신었고요. 그렇게 신다 프로에 오면서 다양한 축구화를 신었고 지금은 푸마의 킹 모델을 신고 있어요. 올해부터 푸마의 스폰서를 받고 있는데 스터드가 높으니까 좋아요. 다른 건 스터드가 얕은데 이건 높거든요. 그리고 착용감도 편한데 요즘은 워낙 축구화를 다 잘 만드니까요. 사실 제가 축구화를 가리지는 않아요. 다른 선수들은 이거 신다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걸로 바꾸고 그런데 전 적응 문제도 없이 무엇을 신든 편해요. 그래서 브랜드 같은 거 따지지 않고 발이 편하다 싶으면 신어요. 그리고 제가 축구화에 발을 맞춰버려요. 275mm를 신으면 꽉 끼고 280mm는 좀 헐거운 느낌이지만 좀 신다 보면 축구화에 발이 적응 돼버리거든요. 사람은 무엇이든 쉽게 적응되잖아요. 축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05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