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시즌이면 터지는 축구화 전쟁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로는 ‘존 테리 파동’을 들 수 있다. 테리는 엄브로의 전속 계약 모델로 이번에 새로 출시된 스페셜리를 신고 멋진 광고 사진을 찍은 인물. 하지만 테리는 지난 7월 말 미국에서 열린 인터 밀란과의 경기에서 놀랍게도 아디다스의 아디퓨어 2(검은색-흰색)을 신고 나섰다. 경기를 지켜보던 에디터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디다스에서 거액을 들여 테리를 영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영국의 축구화 전문사이트 는 엄브로 쪽의 공식 반응을 정했다. 뉴 스페셜리로의 교체가 늦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연습 때 신던 축구화를 신게 됐다는 것이다. 엄브로 측에서는 불을 재빨리 끄기 위해서 “우리는 직접 테리와 충분한 대화을 나눴으며 이제부터는 뉴 스페셜리를 신고 경기에 나설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아디다스는 짐짓 즐거운 눈치다. 아디다스는 “테리가 왜 아디퓨어2를 신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품은 매우 좋은 클래식 가죽 축구화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도 양상은 비슷했을 것이다. 한 쪽의 마케팅 담당자는 진땀을 흘리며 선수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자들의 전화를 받으며 여유 있는 미소를 흘렸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에 모 업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는 “그런건 어떻게 봤어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라며 당혹감을 표시했었다. 유럽의 이적시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축구화 제조사들의 축구화 전쟁도 한창이다. 과연 이번 여름 축구화 자유 계약으로 풀린 선수들과 대어급 선수들은 어떤 축구화를 신게 될까? 당사자들은 속이 타겠지만, 우리는 축구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해보자.

05월18일

스타들의 축구화를 찾아서

호나우두 아디다스가 독점하다시피 한 세계 축구 시장에 미국의 거대 브랜드 나이키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세계 최강 브라질의 유니폼 스폰서를 맡더니 199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두와 손을 잡았다. 호나우두는 나이키의 최신 모델이었던 머큐리얼2.1을 신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나섰다. 4골을 넣은 호나우두의 활약 속에 브라질은 결승전에 진출, 통산 4번째 우승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호나우두가 부진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지네딘 지단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낳은 최고의 스타는 개최국 프랑스에 우승을 안겨준 지단이었다. 지단은 아디다스가 월드컵을 대비해 야심차게 준비한 엑셀레이터를 신고 경기장을 누볐다. 중원에서의 마술 같은 플레이를 펼친 지단은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터뜨리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고 프랑스는 환호했다. 지단의 활약에 아디다스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신세기와 함께 세계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른 호날두. 공격의 어느 곳을 맡겨도 모든 것을 소화하는 그의 플레이. 향후 10년간 세계 축구는 호날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호날두는 06/07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만개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통산 16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나이키의 머큐리얼 베이퍼 III는 그런 호날두의 플레이에 힘을 보탰다. 카카 카카는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발롱도흐를 수상하며 현 세대 최고의 축구 선수 자리에 올랐다. 분명 그가 최고라는 것에 이견을 제시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카카는 미래형 공격수의 표본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항상 자신이 애정을 갖고 신는 아디다스의 아디퓨어와 함께한 그는, 월드컵,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이어 클럽 월드컵까지 거머쥐며 세계 3대 축구제전에서 모두 트로피를 올린 선수로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05월18일

조영증, 나이키 축구화의 선구자

1980년대 초, 국내에 나이키가 상륙하면서 스포츠 용품 특히 스포츠화 부문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고급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던 터라 나이키 운동화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TV에서는 연일 “나이키는 누가 신는가! 마라톤의 알베르토 살라자르! 테니스의 존 메켄로!\"라는 강하고 멋진 멘트의 광고를 내보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시 일반 운동화 가격이 2~3.000원, 비싼 게 4~5.000원 정도였는데 나이키 조깅화는 12.000원, 테니스화 및 농구화는 22.000원이었다. 당시로서는 가계(家計)에도 부담이 되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지갑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질 좋고 값비싼\'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자랑을 넘어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국산 프로스팩스도 등장하면서 나이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는데 나이키가 한발 앞서 나갔다. 1983년부터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자 나이키 열풍은 더욱 강해졌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나이키 운동화 붐이 일어났고, 급기야 각 학교에 ‘나이키 도둑놈’까지 출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난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이키는 분명 최고급 스포츠 메이커였지만 육상-테니스-농구 종목에 한정됐고, 축구 쪽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당시엔 유럽-남미 선수들 조차 나이키 축구화를 신지 않았으니까. 나이키 축구화가 본격적으로(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게된 건 90년대 초,중반부터인데 94년 미국 월드컵을 전후에서 많은 선수들이 나이키 축구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호마리오-베베토 투톱을 비롯한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미국 월드컵 때 나이키 축구화를 신었다. 얼마 전, 올댓부츠 기사를 보니 국내 축구 선수 가운데 나이키와 가장 먼저 계약을 한 인물이 고정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내 선수 가운데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의 기억으로는 조영증(현 파주 트레이닝센터장)이다. 조영증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스위퍼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81년 미국 프로 리그로 진출해 포틀랜드-시카고를 거치며 3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 후 84년에 국내 프로 리그로 복귀해 럭키 금성(현 FC서울)에 입단을 했는데 당시 조영증이 국내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 무렵 국내 성인 선수들 대부분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제품을 많이 신었기 때문에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했다. 당시 조영증이 신었던 축구화는 윤기나는 검정색 가죽에 흰색 나이키 마크가 새겨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프로 축구 초창기 때는 인조 잔디가 깔려있는 효창구장에서도 몇 차례 프로 경기가 벌어졌는데 특히 효창구장에서의 야간 경기 때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 럭키 금성은 프로 축구 창설 이듬 해인 84년부터 리그에 참가했는데 할렐루야-대우 못지않게 멤버가 화려했다. 박세학 감독이 이끄는 럭키 금성은 GK 김현태를 비롯해 조영증-한문배-정해성-권오손-박항서-이용수-강득수-피아퐁 등 수준급 선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조영증은 한문배-정해성-권오손 등과 함께 막강 수비진을 구축했는데 84년 리그에선 자주 센터포워드로 기용돼 28게임/9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박세학 감독은 팀에 무게감 있는 센터포워드가 없자 체격이 좋은 조영증을 센터포워드로 전격 기용해 큰 효과를 봤다. 조영증은 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도 몇 차례 센터포워드로 기용된 적이 있다. 85년 시즌에 럭키 금성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때는 조영증이 월드컵 대표팀에 차출돼 국내 리그엔 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80년대 초, 대표팀 주장도 역임했던 조영증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불가리아-이탈리아전에 풀타임 출전했고,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도 멋진 활약을 펼치며 한국이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신장 178cm의 육중한 체격인 조영증은 별명이 ‘히프’였는데 힘이 장사여서 유럽 공격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조영증은 부족한 스피드를 두뇌 플레이로 커버하는 지능적인 스위퍼였다. 70년대 말, 대표팀에서 조영증과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박성화(스토퍼)는 1년 선배인 조영증을 \'영리한 수비수\'라고 극찬한다. 조영증의 현역 시절 백넘버는 8번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박지성이 말하는 Tiempo Legend Ⅲ

성공하는 모든 것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도전이 늘 열정을 잃지 않는 선수들의 자신감과 함께 한다면 선수들에게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큰 조력자는 그들의 축구화. 새로 출시되는 ‘티엠포 레전드 Ⅲ’ 또한 다가오는 ‘2009/2010’ 시즌에 더 화려한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축구에서 승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빠른 선수가 공간을 제치고 달린 뒤 단 한 명의 골키퍼가 막고 있을 뿐인 골문 안으로 작은 공을 넣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한 방정식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라운드 위에 선 11명의 선수들에게 그 임무는 지상 최대의 과제나 다름없다. 다른 선수들과 조금이라도 차별되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지 않는 한 승리와의 거리는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팀이라는 찬사가 곁을 떠나지 않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런 간단한 승리의 방정식을 그 어떤 팀들보다 정교하게 구현해 내는 클럽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최고의 클럽에서 당당히 빛나는 주전으로 우뚝 선 박지성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자신만의 성실함을 무기로 클럽이 빚어내는 승리의 방정식에 자신의 색깔을 더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 늘 함께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의 축구화 ‘티엠포 레전드 Ⅲ(Tiempo Legend Ⅲ)’다. 2009년 7월 더 클래식한 디자인과 컬러로 새롭게 태어난 ‘티엠포 레전드 Ⅲ’는 무엇보다 정확한 터치감각과 정교한 볼 컨트롤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라운드 위에서 많은 공간을 사용해야 하고,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는 미드필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착화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티엠포 레전드 Ⅲ’ 경기를 지배하고 승리를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발끝 감각에 의존해 빠른 판단을 끌어내는 선수들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어 졌다. 선수들이 원하는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기능을 극대화시킨다는 나이키만의 축구화 제작에 담긴 철학과 디자인 정신이 그래도 반영된 결과물이다. 정교함을 더해 재탄생의 과정을 거친 만큼 전통 축구화의 클래식한 멋을 그대로 살리면서 최첨단 기술을 통해 구현된 제작공법이 축구화의 기능을 배가시켰다. 또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천연가죽이 디자인 철학과 기능추구의 양면이 부합할 수 있도록 장점을 극대화 시킨다. 완벽에 가까운 터치감과 편안한 느낌이 경기 내내 선수 자신의 플레이를 최고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선수가 더 편안한 상태에서 더 오래 달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 또한 이번 ‘티엠포 레전드 Ⅲ’ 제작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실제로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사우디아라바아와의 경기에서 나이키의 ‘티엠포 레전드 Ⅲ’ 제품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선 박지성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드는 제품이다. 디자인도 상당히 심플하게 잘 나온 것 같고 축구화 무게도 훨씬 더 가벼워졌다. 신었을 때의 실제 느낌이 이전 제품보다 착용감에서도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축구화를 신었을 때 외피가 더 얇아지고,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서 볼을 찰 때도 상당히 정확하게 그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축구화보다 훨씬 진일보한 제품이다”며 실제 제품을 경험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원뿔형과 칼날형 스터드의 조화나 완벽한 접지력, 정교한 느낌의 볼 컨트롤이 가능한 외피 그리고 쿠셔닝 효과를 더하기 위해 추가된 고성능 안창에 이르기까지 ‘티엠포 레전드 Ⅲ’는 최고의 열정이 빚어낸 최고의 전설이다. 가죽 덮개가 살짝 외피를 덮어 끈을 감싸는 부분을 정리해 주는 등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현대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제로 경기 중에 필요한 세세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고자 노력했다. 박지성에게 자신의 축구화는 어떤 의미일까?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축구화의 조건은. 발에 잘 맞고, 편안한 축구화. 거기에 더해 전체적인 무게까지 가볍다면 금상첨화다. 그렇다면 티엠포 레전드가 그런 축구화인가? 일단 티엠포 레전드가 가장 좋은 이유는 편안하다는 점이다. 천연 가죽 소재를 쓰면서도 다른 제품들과 달리 고전적인 축구화의 장점들 그리고 편안한 착화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축구화다. 평소에 상상만으로 그려 본 축구화의 이미지가 있나? ‘이런 축구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상상을 했었는데 다 안 된다고 하셔서.(웃음) 사실 지금 신고 있는 축구화를 봐도 그렇지만 나이키에서 제작하는 축구화들은 언제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보다 실제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상상을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늘 상상했던 것 이상의 축구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경기에서 그런 축구화의 장점을 느낄 수 있고, 도움을 받으며 신고 있기 때문에 만족할 수 있는 거고. 선수들끼리 축구화가 새로 출시되면 피드백을 나누기도 하나?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티엠포 레전드 Ⅲ’에 관해서는 어떤 의견을 나눴는지 궁금하다.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기능성나 축구화의 특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제품이 출시 됐을 때 특별히 피드백을 주고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부분은 색깔이다. ‘이번 색깔은 안 좋다’, ‘이런 색깔은 잘 나왔다’ 등등 뭐 그런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웃음) 유니폼이나 신발 등 상당히 애착이 가는 본인만의 용품들이 많을 것 같다.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경기 후에 교환한 유니폼이나 착용했던 유니폼과 축구화 등 대부분의 용품들은 아버지가 관리하고 계신다. 직접 관리하시는 장소에 잘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사실 특별히 어느 한 경기에 신었던 축구화, 어느 한 팀의 유니폼에 애착이 간다고 하기는 힘들다. 내게는 어느 한 클럽도 그저 지나치는 팀이 아니었다. 의미 없는 시기의 클럽도 없었다. 모든 팀에서 다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었기 때문에 그 각각의 유니폼과 축구화 그리고 경험들이 소중하다.

05월18일

'레전드' 홍명보가 사랑한 축구화

제가 현역시절에 가장 선호했던 브랜드는 디아도라였습니다. 포항에 있을 때는 거의 디아도라 축구화만 신고 뛰었어요. 일단 가죽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발에 딱 맞을 뿐 아니라 편안한 느낌으로 신을 수 있는 축구화였습니다. 한때 N사에서 광범위하게 선수들과 스폰서 계약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때도 저는 축구화만큼은 디아도라를 고집했을 정도죠. 관련된 에피소드라면 브라질로 전지훈련 갔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전지훈련을 갈 때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굉장히 많은 축구화를 챙깁니다. 저도 브라질로 떠나기 전 이탈리아에서 갖고 온 디아도라 새 축구화를 몇 켤레 챙겨서 떠났죠. 그런데 하필이면 전훈 기간 내내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데 연습경기를 하는 일정이 계속됐어요. 신기한 건, 비올 때 신었던 신발을 말려서 다시 신으면 완전히 새 축구화 같았다는 겁니다. 그때 착용감이 너무 좋아서 그 축구화를 일년 넘도록 신었던 적이 있어요. 그 즈음 디아도라가 한국에 브랜드를 런칭하고 매장들도 막 생겼던 것 같아요. 로베르토 바지오가 방한 경기를 갖고 들르기도 했죠. 뒤져보면 어딘가에 바지오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을 겁니다.(웃음) 저는 투박한 느낌의 축구화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신었던 축구화는 당시로는 꽤 샤프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너무 가벼운 정도는 아니었고요. 축구화가 경량화 추세를 보이면서 부상이 잦아진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축구화 소재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가죽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발이 밀리는 일은 없었는데, 요즘은 가죽이 아니어서 발이 밀리고 뼈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재에 따라서도 발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죠.

05월18일

'황금 왼발' 나나미의 축구화 선택법

90년대 중, 후반 아시아 최정상급 미드필더로서 맹활약했던 일본의 나나미 히로시. 현역 시절 그의 왼발에서 뿜어나오는 날카로운 패스는 천하일품이었다. 그의 ‘킬러 패스’는 라이벌인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일본 축구 전문가들은 나나미 히로시와 나카다 히데토시, 둘을 놓고 이렇게 평한다. \"종합적인 면에선 나카다가 앞서지만 \'나나미의 왼발\'과 \'나카다의 오른발\'을 비교했을 때는 나나미의 왼발이 한수 위!“라고 입을 모은다. 탁월한 경기 조율 능력과 섬세한 패싱력을 자랑했던 나나미이기에 축구화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하고 또한 최고급 모델을 신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뜻밖에도 나나미는 축구화에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었다. 현역 시절 나나미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계약 관계에 있는 아디다스 측에서 “이번에 이 모델을 신어줄 수 있겠냐?”고 하면 무조건 “알았다!”고 답했다. 축구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어떤 메이커든지 같은 모델이라도 일반 매장에서 판매 되는 제품과 스타급 선수들이 신는 제품은 차이가 있다. 선수들이 신는 제품은 선수 개인의 발 형태와 특징을 살려서 제작을 하는데 나나미는일반 매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신었다. 그렇다고 나나미가 무조건 아무 축구화나 다 신은 건 아니다. 나나미도 기피하는 축구화가 있었다. 바로 캥거루 가죽 소재의 축구화다. 첫 번째 칼럼(‘초고급 축구화의 제1 원소, 천연 가죽’)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각 메이커 최고급 모델은 대부분 캥거루 가죽 소재이고, 선수들 거의 최고급 모델을 신는다. 하지만 나나미는 소가죽 소재의 축구화를 선호했다. 캥거루 가죽 축구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가죽이 매우 얇고 부드럽다는 것인데 오래 신거나 혹은 물에 젖었을 경우 늘어나는 단점이 있다. 나나미가 처음 축구화를 신은 건 5살 때였다. 당시 꼬마였던 나나미에게 맞는 사이즈의 축구화가 없었기 때문에 3센티미터 정도 큰 축구화를 구입한 후, 발 앞 쪽에 솜을 잔뜩 끼워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캥거루 가죽 축구화를 신기 시작 했는데 수중전을 한번 치르고 나면 축구화가 많이 늘어나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어릴 적, 불편했던 그 느낌이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져 나나미는 현역 생활동안 캥거루 가죽 소재의 축구화를 거의 신지 않았다. 나나미는 축구화를 고를 때 크게 두 가지에 중점을 뒀다. 하나는, 축구화 앞 부분에 (실)박음질이 여러 줄로 된 걸 선호했다. 박음질이 여러 줄로 돼있는 축구화가 덜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축구화 뒤꿈치 부분이 깊은 제품을 좋아했다. 나나미가 아디다스와 계약할 당시 타사 축구화와 비교를 해봤다고 하는데 아디다스 축구화가 타사 제품에 비해 뒤꿈치 부분이 조금 더 깊었다고 한다. 나나미는 축구화 뒤꿈치 부분이 깊어야 킥을 하는데 안정감이 있다고 말한다. 나나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축구화는 “볼과 느낌이 통하는 것”이란다. 2000년 아시안컵 MVP 수상자이기도한 나나미는 08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현재는 축구 해설자 겸 평론가로서 활동 중이다. 사진= ⓒ주빌로 이와타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평발의 박지성이 처음으로 선택한 축구화는?

제 첫 축구화는 프로 월드컵으로 기억해요. 사실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는 모든 용품을 학교에서 받았어요. 축구화까지 전부 다요. 그냥 시장에서 살 수 있었던 이름없는 축구화였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처음으로 산 축구화가 프로 월드컵 축구화였어요.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매장에서 샀어요. 당시 새 축구화를 사고 난 후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시장에서 그냥 파는 축구화가 아니라 메이커였기 때문에 당연히 좋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용품이 손에 들어온다고 해서 왠지 축구가 더 잘 될 것 같은 느낌은 없었어요. 단지 새로운 축구화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죠. 지금 현재는 모든 것을 구단에서 관리를 해주지만, 학생 시절에는 구두약을 칠해가며 관리를 했던 기억이 나요. 맨 땅에서 축구를 하기 때문에 축구화의 수명이 그리 길지도 않았어요. 밑창이 빨리 닳고는 했는데, 지금은 스터드를 교체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에는 일체형이었기 때문에 밑창 전체를 교체해야 했습니다. 이 방법이 새로운 축구화를 사는 것 보다 더 저렴했어요.(웃음) 밑창을 한 번 교체하는 것은 기본이고, 두 번 교체하면 ‘많이’ 갈았다고 하고, 세 번 교체하면 ‘징하게’ 갈았다고 농담을 하곤 했어요. 제가 평발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특별히 다른 축구화를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많은 종류의 축구화가 없었거든요. 현재의 티엠포 스타일, 캥거루 가죽으로 된 축구화가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어린 시절에 대표팀 경기를 많이 지켜 보면 선수들이 메이커 축구화를 신고 나오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축구화를 그리 많이 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05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