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화 선택, 왕도는 없지만 기본은 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 오른 서독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세계 최강 헝가리를 물리치는 \'베른의 기적\'을 일으킨다. 서독을 우승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아돌프 다슬러(Adolf Dassler)가 고안한 아디다스의 탈착식 스터드 축구화였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는 경기 도중에도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어서 진흙에서 경기를 펼치는 데 유리했던 것이다. 이처럼 축구화와 경기력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축구화는 축구 선수의 경기력에 약 20%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갈수록 축구화 선택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축구화를 고를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 먼저 \'발에 딱 맞는 축구화가 좋다\'라는 오해부터 버려야 한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축구화는 자신의 발 치수보다 다소 여유 있게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적당한 사이즈는 발바닥 전체로 압력을 분산시켜 발의 피로도를 줄이는 한편 발목 등의 관절을 유연하게 만들어 볼 컨트롤이 용이하고 부상 위험도 줄여준다. 또한 축구화를 신을 때 오른발을 기준으로 먼저 신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왼발보다 오른발이 약간 크기 때문이다. 특히 발가락 부상은 양 쪽 발 사이즈 차이에서 기인함에 따라 맞춤형 축구화를 신을 수 없는 이들은 오른발 사이즈에 맞춰 신는 것이 부상 예방에 가장 효과적이다. 아울러 축구화 사이즈 선택에는 시간대도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발은 오전일 때 크기가 작아지는 데 이로 인해 축구화를 구입 할 때는 하루 중 발이 가장 커져있는 오후 5~6시가 가장 적당하다. 축구화의 재질도 고려해야 한다. 축구화는 천연 가죽과 인조피혁으로 양분할 수 있다. 인조 가죽은 내구성이 좋은 반면 천연 가죽은 착용 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거친 환경에 노출된 축구 동호인의 경우 관리가 어렵고 우천 시 가죽 변형이 생기는 천연 가죽 제품보다 인조피혁과 천연 가죽이 적당히 혼합된 축구화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스터드다. 경기장의 지면 상태와 포지션에 따라 스터드의 개수가 매우 중요하다. 국내 운동장 대부분이 맨땅인 것을 고려한다면 스터드가 6개인 SG(SOFT GROUND) 스터드 축구화보다는 12개 이상인 축구화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또한 스터드가 적은 축구화일 경우 방향전환과 순발력은 뛰어나지만 지면과 스터드의 마찰이 많아 오래 신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05월18일

스타들의 축구화를 찾아서 3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현역 시절 \'Pixy(요정)‘로 불리운 유고의 명선수. 유럽 최고의 기술 축구를 구사하는 유고가 배출한 최고의 테크니션이 스토이코비치다. 84년 18세의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스토이코비치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8강전에서 유고가 아르헨티나에게 승부차기 끝에 아깝게 패했는데 경기 후, 디에고 마라도나가 스토이코비치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면서 \"이제부터 너의 시대다!\"라고 말하는 등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후 스토이코비치는 세계 톱클라스 플레이어로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테크닉, 패싱력, 득점력 등을 모두 갖춘 스토이코비치는 탁월한 리더쉽도 정평이 났다.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에서 7년여 간 활약했는데 당시 그의 리더쉽은 동료 선수들은 물론 타팀 선수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스토이코비치는 현역 시절 프랑스 제품인 르꼬끄 스포르티브(le coq sportif) 축구화를 애용했다. 그 무렵 스토이코비치가 신었던 모델명은 plume pixyⅡ.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스타들의 축구화를 찾아서 2

지난달 게재된 김성진 기자의 \'스타들의 축구화를 찾아서\'라는 기사를 읽다가 문득 옛 선수들의 축구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성진 기자 기사의 후속편 격으로 추억의 선수들의 추억의 축구화에 대한 글을 써봤다. 에우제비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 포르투갈VS북한. 조별 예선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강호 이탈리아를 1대0으로 무너뜨린 북한은 이날도 25분 사이에 무려 3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또 한번의 기적을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저력의 포르투갈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이후 내리 5골을 몰아 넣으면서 결국 5대3으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는데 5골 중 4골을 에우제비우가 터뜨렸다. 포르투갈은 준결승전에서 개최국 잉글랜드와 맞붙어 2대1로 패했지만 이날도 에우제비우는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켰다. 이 대회에서 에우제비우는 득점왕(6시합/9골)을 차지하며 65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자로서의 존재를 과시했는데 당시 에우제비우가 신은 축구화는 PUMA EuseBio(*편집자주-2007년 40주년 기념 모델 출시)였다. 아프리카 모잠비크 출신의 에우제비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공격수로서 그 무렵 브라질의 펠레에게 필적할 유일한 스트라이커였다. ‘흑표범’으로 불리운 에우제비오는 현역 통산 727시합/715골, 대표팀 A매치 통산 64시합/41골을 기록했다. 마리오 캠페스 디에고 마라도나 보다 먼저 세계에 이름을 떨친 아르헨티나의 스타. 1976년 로사리오 센트럴 클럽에서 스페인 발렌시아로 이적 후 76-77, 77-78시즌 연속으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캠페스는 78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대회 MVP와 득점왕(6골)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캠페스는 그 해 남미 연간 최우수 선수상도 수상했다. 74, 78, 82년 월드컵에 연속으로 참가한 캠페스는 현역 시절 줄곧 푸마 축구화를 애용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저돌적인 공격력을 과시했던 캠페스의 별명은 \'투우사\'였다. 미셸 플라티니 80년대 ‘장군’으로 불리 운 프랑스 역대 최고의 축구 영웅. 비록 월드컵 우승 경험은 없지만 유럽 선수권 및 챔피언스컵, 토요타컵 등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84년 유럽 선수권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득점왕을 차지한 플라티니는 유벤투스 시절 82/83, 83/84, 84/85시즌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고 83, 84, 85년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플라티니는 유벤투스 시절 프랑스제 패트릭(PATRICK) 축구화를 즐겨 신었는데 유벤투스 입단 첫 시즌(82/83)에 신었던 모델명은 PLATINI WORLD였다. 플라티니가 아디다스 축구화도 신었지만 필자에게는 패트릭 축구화를 신은 그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플라티니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지만 스트라이커라고 봐도 좋을 만큼 탁월한 공격력과 득점 능력을 자랑했다. ‘천하의’ 지네딘 지단 조차도 플라티니 앞에서는 결코 크게 느껴지질 않는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임중용의 징크스 "떨어져도 신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서경축구화가 대세였어요. 당시 친구들 대부분은 상가 시장에서 파는 서경축구화를 신었죠. 친구들 열 명 중에 여덟 명이 갖고 있었으니까요. 저도 처음엔 그걸 신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 좋다는 키카축구화를 사오신 거에요. 지금으로 따지면 서경축구화가 9천원이라면 키카축구화는 3만원이었죠. 그만큼 비싸고 좋은 축구화였어요. 그래서 키카축구화를 신고 있으면 ‘야, 제 대단하구나’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축구화하니 생각나는데 축구 선수들이라면 으레 그렇겠지만 저도 축구화에 대한 징크스가 있어요. 특정한 축구화를 신고 경기를 뛰었는데 경기에서 져버리면 다음엔 그 축구화를 신기가 꺼려지는 그런 징크스요. 처음 딱 신었을 때 느낌이 안 좋고 나랑 안 맞다 싶은 게 있거든요. 반면 어떤 축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갔는데 이기면 다음에도 그 축구화만 신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행운의 축구화인 셈이죠. 그래서 2005년 인천이 승승장구 했을 땐 축구화가 떨어져도 바꾸지 않고 계속 신었어요. 당시엔 스폰서가 없어서 나이키 축구화를 사서 신었는데 징크스 때문에 떨어진 축구화를 계속 신고 또 신었죠. 그러다 한 번 지면 그때서야 축구화를 바꾸곤 했어요. 요즘 들어선 미즈노 축구화를 신고 있어요. 시합용과 연습용까지 한 시즌에만 10켤레 이상을 신는 것 같아요. 지금 선수들 추세를 봐도 옛날엔 아디다스를 많이 신었는데 요새는 나이키랑 미즈노를 많이 신더라고요. 지금 신고 있는 건 수비 전용 축구화(*편집자주: 웨이브 블레이드)에요. 미즈노 축구화는 일단 가죽이 좋으니깐 발이 편해요. 그래서 즐겨 신고 있습니다.

05월18일

축구화 선택의 왕도는 없다

축구화 전문 기자(?)라는 수식어를 달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떤 축구화가 가장 좋나요? 새로 나온 모델이 좋나요? 아니면 클래식 축구화가 좋나요?”라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신제품의 홍수를 생각한다면, 매우 철학적인 질문인 동시에 전혀 특별하지 않은 질문이다. 모든 물건이 그러하듯이 축구화도 특색이 있고, 각자에게 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축구를 업으로 삼는 선수들을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다. 일단 첨단 과학기술로 탄생한 새로운 축구화가 쏟아져 나오지만 고전적인 모델을 선호하는 선수 유형이 있다. 전북 현대의 최철순과 성남에서 뛰었던 모따는 올드 모델인 ‘코파문디알’을 선호하는 선수. 최철순은 “코파문디알이 가장 안정적이다. 새로 나온 축구화는 스터드 배열이 달라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FC서울의 데얀과 아디도 미즈노의 고전 모델을 즐겨 착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전적인 축구화를 선호하는 선수도 있지만, 새로운 축구화를 즐기는 선수들도 많다. FC서울의 김치우도 그 중 한 명. “축구화는 새로운 모델이 더 좋다. 새 모델은 더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김치우와 같은 유형으로는 성남의 한동원과 볼턴으로 떠난 이청용이 있다. 이 두 선수는 신는 모델은 다르지만 매번 새로운 모델이 출시되면 그것에 따른다. 물론 비율로 따지면 최신 축구화를 신는 선수들의 비중이 가장 크다. 고전적인 모델과 최신 모델 사이에 서있는 선수도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이천수. 프리킥을 차기 위해 기다리는 이천수의 사진을 보면 그는 거의 같은 축구화를 착용하고 있다. 이천수는 후속모델이 나온 후에도 ‘머큐리얼 베이퍼 2’를 착용하고 많은 경기에 나섰다. 이천수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그 모델이 가장 발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정경호도 같은 모델을 손호하기로 유명하다. 이영표도 비슷한 경우다. 이영표도 ‘에어줌 토탈 90 슈프리머시’라는 제품을 매우 선호하고 있다. 결국 답은 없다. 선수들의 경우를 봐도 축구화 선택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사람마다 족형이 모두 다르고 선호하는 포지션과 경기 유형이 있기 때문에 축구화 선택도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괜한 고민으로 인터넷을 뒤지거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축구화 선택의 왕도를 꼽으라면 단 한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직접 매장에 가서 신어보라는 것이다. 구매는 인터넷으로 하더라도 신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축구화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없다.

05월18일

한국 축구화 역사의 산 증인 박항서

우리는 정신 축구화 신었다. 정신 축구화 알고 있나? 우리 때는 서경, 정신 축구화를 거의 다 신었지. 당시에는 아디다스하고 푸마가 유명했는데, 아디다스가 더 좋았다.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디다스 축구화를 밀수해서 들어오고 그랬거든. 외국하고 시합 나가서 사 들어 오던지 배타는 사람들이 나가면 부탁하고 그랬다. 아는 분 중에 외양선 타는 분이 있어서 주로 그 쪽에 부탁을 했다. 그 때는 미즈노, 나이키도 없었다. (: 최강희 감독은 아식스를 주로 신었다던데?) 에이 뻥치고 있어. 아식스가 7년 가까이 대표팀 스폰서를 하기도 했다. 다른 축구화보다 좀 가벼웠다. 그런데 그것은 나이가 좀 들었을 때고 이야기고, 최 감독이 젊었을 때는 아식스가 안나왔다. 물론 일본가면 아식스 사러 가고 그랬다. 7년 가까이 아식스가 스폰서를 했다. 나이키는 90년 대에만 하더라도 신지도 않았다. 프로스펙스도 시장에 나오면서 선수들에게 많이 물건을 대주면서 신어보라 했는데도 신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키가 갑자기 투자를 하면서 품질이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동기 중에 유태목(현 성남 일화 부단장)이는 손재주가 좋아서 뽕(스터드)을 정말 잘 깎았다. 당시에는 뽕을 사가면 정신 축구화에서 못으로 박아줬는데, 그 친구는 손재주가 좋아서 파는 것보다 더 잘 만들었다. 나중에 한 번 가서 꼭 물어보길 바란다. 그런데 요즘에는 축구화가 이렇게 좋은데 왜 그 정도 실력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스트레칭도 없었다. 국민체조하고 아스팔트 위를 뛰었다. 피로골절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지. 요즘 선수들은 체격은 좋아졌지만 체력은 떨어진 것 같다.

05월18일

정통(正統)과 이단(異端)

현역 시절 오베라트와 강력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 귄터 네처다. 네처는 독일이 낳은 불세출의 판타지스타로서 그의 패스는 \'cm 단위의 패스\'로 불리었다. 1972년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유럽컵에서 독일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네처는 탁월한 경기 조율로 조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그 대회 준결승전이 독일VS잉글랜드전이었다. 장소는 웸블리 구장. 그 날 독일이 고든 뱅크스와 보비 무어가 버틴 잉글랜드를 3대1로 완파했는데 네처가 군계일학의 플레이를 펼쳤다. 이 경기는 독일 축구 사상 처음으로 적지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한 것이기에 의미는 남달랐다. 그러나 2년 후, 자국에서 개최된 74년 독일 월드컵에서 네처는 오베라트에게 밀려 동독전에만 출전하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벤치를 지키는 설움을 당했다. 당시 독일 대표팀 헬무트 쉔 감독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창조성(네처)\'이 아닌 \'기동력(오베라트)\'을 택했다. 비록 네처가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오베라트에게 뒤지지만 클럽에서의 활약 및 빅타이틀 우승 횟수는 오베라트를 압도한다. 네처는 독일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을 때만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고, 소속팀인 보르시아MG와 레알 마드리드 등 에서는 푸마 축구화를 신었다. 덧. 베켄바워가 전성기가 지난 후인 77~80, 83년에 미국 뉴욕 코스모스 클럽에서 뛴 적이 있는데 그 무렵 간간히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걸로 기억된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