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Kronos), 월드컵 득점왕의 무기

크로노스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4년 후인 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이 대회에서 불가리아의 슈퍼스타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크로노스 축구화를 신고 맹활약하면서 득점왕을 차지한 것이다. 8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등장한 불가리아는 세계적 공격수 스토이치코프를 중심으로 매 경기 화끈한 공격력을 펼치며 4강까지 진출했다. 스토이치코프는 독일과의 8강전에서 환상의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는 등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며 총 6골로 러시아의 올레그 살렌코와 함께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스토이치코프가 신었던 축구화는 소가죽(Calf) 제품이었고, 모델명은 Stoitchkov Top이었는데 혀 부분에 \'Stoitchkov Top\'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크로노스 축구화를 신은 선수들이 2회 연속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했다는 것은 크로노스사로서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크로노스 축구화는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가죽이 매우 부드럽게 착용감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크로노스는 스토이치코프를 비롯한 세계적 선수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그들의 조언을 반영해 질 좋은 축구화를 생산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SERIE-A 우디네세, AS로마 등에서 명성을 날린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 아벨 발보도 크로노스 애용자 가운데 한 명이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

아련한 한국 축구화의 추억 그리고 역사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에는 시장표 축구화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제품은 ‘월드컵’과 ‘재규어’였다. ‘월드컵’은 검정색 인조 가죽에 흰색 마크, 흰색 줄, 검정색 고무 창으로 된 제품이었는데 당시 월드컵 축구화를 신으면 학교에서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그 때 나온 월드컵 축구화는 W마크가 아니었다.) ‘월드컵’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축구화가 ‘재규어(Jaguar)’다. 배진경 기자의 기사(\'어린 황선홍의 소중한 축구화\')를 보면 황선홍 감독이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지가 사주신 첫 축구화는 \'자가\'라는 시장표 축구화였어요.\"라고 말을 했는데 황선홍 감독이 말한 \'자가\'가 바로 재규어다. 재규어는 월드컵 축구화 보다 무광택의 검정색 인조 가죽에 흰색 줄이었고, 마치 재규어가 뛰는 모습의 흰색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현재 미즈노 디자인과 비슷하다.) 월드컵-재규어의 반응이 좋자 박스컵, 킹스컵 등의 시장표 축구화가 연이어 등장했으나 월드컵-재규어를 능가하지 못했고 이후에 생산된 우남 축구화가월드컵-재규어 보다 질이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우남은 검정색 가죽에 흰색 마크, 흰색 줄로 된 축구화였는데 프로스팩스와 비슷한 마크였다.(참고: 박스컵(Parks Cup)은 당시 국내에서 매년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축구 대회를 의미하는 것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는 틈만 나면 효창구장에 담을 넘어 들어가 경기를 관전했는데 선수들이 신고 있는 축구화를 보니 대부분 검정색 줄이었다. 그걸 알게 된 필자는 축구화 줄을 검정색으로 교환해서 신었다. 박항서 감독을 비롯한 여러 축구인들이 언급한 서경(西京)-정신(正信) 축구화는 정확히 말하면 ‘선수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 축구부 학생들과 성인들(조기 축구 아저씨들)이 주로 신었다. 월드컵과 재규어 축구화는 시장 신발 가게에서 팔았고, 정신과 서경 축구화는 체육사에서 팔았는데 서경과 정신은 초등학생들 발에 맞는 작은 사이즈를 많이 생산하지 않았던 터라 동네에 있는 체육사에서는 구입이 어려웠고 동대문 운동장 근처 대형 체육사에 가야 구입할 수 있었다. 값은 당연히 서경-정신 축구화가 월드컵-재규어 축구화 보다 비쌌다. 그 무렵 서경 축구화의 인지도는 독보적이었다. 조기 축구 아저씨들 80% 이상이 서경 축구화를 신었을 정도니까. 당시 서경 축구화는 가죽 제품 보다 쎄무로 된 제품을 많이 생산했는데 그 중에서 검정색 쎄무에 초록색 라인이 새겨진 디자인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서경 축구화의 특색 중 하나가 혀 부분이 ‘진짜’ 선수들이 신는 독일제 아디다스와 일제 아식스 축구화처럼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정색 뿐 아니라 파란색 세무로 된 축구화도 생산이 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경 축구화가 시대를 앞서간 듯하다. 정신 축구화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서경 축구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신의 경우엔 축구화 뿐 아니라 복싱화도 생산을 했다. 한국 프로 복싱사에 한 획을 그은 前WBA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작은 거인\' 김태식이 현역 시절 빨간색 슈즈를 신었는데 그 슈즈가 정신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덧글: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축구팬들은 물론 축구인들 조차도 축구화 밑(바닥) 부분을 ‘스터드(Stud)’라고 하지 않고 \'뽕\' 혹은 \'찡\'이라고 표현했다. 필자의 기억에 \'스터드\'란 단어를 팬들에게 각인시킨 축구인이 이우현 선생이다.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낸 이우현 선생은 80년대 중반 MBC 축구 해설위원을 역임했는데 그 무렵 중계 때 “오늘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잔디가 미끄럽다. 이럴 때는 선수들이 고무 스터드가 아닌 알루미늄 스터드 축구화를 신는 게 훨씬 낫다“는 등의 해설을 해준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우현 선생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도 MBC 해설위원을 담당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5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