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축구화와 닮은 축구화를 착용한 선수

[15년 전 축구화와 닮은 축구화를 착용한 선수]   애스턴 빌라의 미드필터 ‘헨리 랜스버리’는 최근 흥미로운 축구화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착용한 축구화는 아디다스의 ‘코파 글로로 17.2’입니다. 근데 색상이 굉장히 낯익죠? 랜스버리가 착용한 색상은 2002년 '프레데터 매니아'의 샴페인 색상입니다. 얼핏 보면 프레데터 매니아로 착각할 정도네요.   (2002년 베컴이 착용한 프레데터 매니아)     랜스버리는 신기하게도 코파 글로로의 애용자입니다. 글로로 16.1부터 다양한 색상의 코파 글로로를 계속 착용해왔습니다. 선수들에게 지급되지 않고 최상급으로 출시되지 않는 코파 글로로를 손수 구매해 사용하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코파 글로로는 17.2버전까지만 나오는 축구화입니다. 캥거루 가죽보다는 뻣뻣한 ‘타우르스 가죽’으로 제작된 천연 가죽 축구화입니다. 너무 부드러운 어퍼보다 조금 뻣뻣한 어퍼가 슈팅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뻣뻣한 가죽을 찾는 프로 선수들도 있습니다.     코파 글로로 17.2는 가격이 약 12만 원에 형성된 천연 가죽 축구화입니다. 충분히 매리트 있는 가격입니다. 축구화 구매에 큰 돈 들이는 게 부담스럽다면! 클래식한 실루엣에 화려한 색상이 특징인 천연 가죽 축구화 코파 글로로 17.2 어떠신가요?   축구화의 모든 것 All that boots

12월01일

미즈노 축구화의 선각자 카레카

미즈노의 역사는 백 년이 넘는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인 미즈노는 특히 최고 수준의 야구 용품을 생산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미즈노는 1980년대 초까지 나이키와 함께 축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브랜드로 인식돼 있었다. 그랬던 미즈노가 1985년에 수준급의 축구화 모렐리아를 생산해 냈다. 미즈노 모렐리아 축구화의 등장은 세계 축구계에 신선한 바람이었다. 모렐리아 축구화는 마크가 과거의 미즈노 스포츠화와 달랐다. 그 이전까지 야구화를 비롯한 모든 미즈노 스포츠화에는 MIZUNO 첫 글자인 'M'이 새겨져 있었으나 모렐리아 축구화에는 M이 아닌 하늘을 나는 새 모양이 새겨져 있었고 로고도 MIZUNO가 아닌 RUN BIRD로 바뀌었다.   (미즈노의 런 버드 로고)     세계적 선수 가운데 미즈노 축구화를 가장 먼저 착용한 선수는 브라질의 카레카였다. 카레카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미즈노 셀레상 축구화를 착용하고 5경기에 풀타임 출전해 5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브라질은 8강전에서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에 승부차기로 패해 4강 진출이 좌절됐으나 이 대회에서 카레카의 활약은 눈부셨다. 카레카의 맹활약 덕분에 미즈노 축구화의 홍보 효과가 꽤 컸다. 멕시코 월드컵을 통해 세계적 스트라이커 반열에 올라선 카레카는 1987년 이탈리아 세리에A 나폴리로 이적해 디에고 마라도나와 콤비를 이뤄 1988-1989시즌 UEFA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그 이듬 해인 1989-1990시즌 나폴리가 염원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도 큰 몫을 했다. 카레카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참가했는데 당시 카레카는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 바스턴과 함께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서 주목을 받으며 대회 득점왕 후보로 거론됐다. 그러나 브라질은 16강전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게 0-1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1990년 월드컵 때도 카레카는 변함없이 미즈노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카레카가 86년 월드컵에서 착용한 셀레상과 셀레상에서 영감받아 제작된 모렐리아 네오 2)     당시 카레카 뿐 아니라 둥가, 블랑코, 리카르두 로샤 등 브라질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 여러 명이 미즈노를 착용했다. 4년 후인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지난 대회 때 보다 더 많은 수의 선수들이 미즈노 축구화를 신었다. 특히 우승국인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중앙 수비수인 마르시아 산토스, 아우다이르, 레오나르두 등이 미즈노 축구화를 착용하고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거치며 미즈노는 세계 축구화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고 현재는 아디다스-푸마-나이키 등의 축구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미즈노 모렐리아가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선수들과 축구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계적 스트라이커 카레카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카레카는 미즈노 축구화의 선각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화의 모든 것 All that boots

12월01일

권경원 曰 "칸나바로에게 배운 걸 잘 써먹고 있다"

  박대성 기자= 11월 신태용호는 인상적이었다. 남미와 유럽 강호에 조직적인 모습을 보였다. 권경원은 이목이 집중된 콜롬이바전에서 중앙 수비를 맡았고, 팀 승리에 기여했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경질 후 이렇다 할 색깔을 보이지 못했다.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2경기를 남겨두고 급하게 수장이 바뀌면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힘겹게 본선행에 진출했지만 10월 유럽 원정마저 완패했다.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와 아프리카 모로코에 7골을 실점했다. 특색없는 색깔과 변형 스리백이 도마에 올랐다. 무기력한 수비도 비판 대상이었다.   권경원 입장에서 10월 러시아전은 쓰라린 기억이다. A매치 데뷔전을 치렀지만 2-4로 패했다. 대표팀 수비는 러시아 공격에 추풍낙엽이었다. 세트피스 수비 실패, 자책골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중국화 논란도 다시금 불거졌다. 11월은 반전의 서막이었다. 신태용 감독은 4-4-2를 선택했고 타이트한 압박과 좁은 두 줄 수비로 상대를 괴롭혔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자세와 최정예가 아닌 점이 제기됐지만, 한국의 퍼포먼스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당시 권경원은 장현수와 포백을 구성했다. 신태용 감독은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 소집 명단에 권경원을 또 포함시켰다. 권경원 차출은 11월 A매치에서 보인 성과로 해석된다. E-1 챔피언십에서 장현수와 호흡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권경원은 신태용호 변화 중심에 있었다. 10월 변형 스리백과 11월 4-4-2 시스템을 경험했다. 권경원에게 전술 변화에 관해 묻자 “(11월 A매치에서) 1선과 2선 움직임이 좋았다. 두 줄 수비는 수비 입장에서 기본이다. 각자 소속팀에서 움직임이 달라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선수가 빨리 적응하는 게 숙제”라고 답했다. 11월 맹활약 원동력은 간절함이었다. 그는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매번 소집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뛰고 있다. 김영권이 뽑혔다면 E-1 챔피언십 차출도 보장할 수 없다. 매 경기 죽을 각오로 그라운드를 누빈다”라고 말했다. 수비수로서 한 단계 도약한 지침서는 파비오 칸나바로였다. 권경원은 소속팀 톈진 취안젠에서 칸나바로의 지도를 받았다. 칸나바로는 지난해 6월 텐진 지휘봉을 잡았고, 다음 시즌부터 광저우 에버그란데 사령탑에 부임한다. 권경원에게 어떤 지도를 했을까. 권경원은 장현수와의 호흡을 이야기하면서 “칸나바로에게 배운 걸 잘 써먹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경원에 따르면, 칸나바로는 항상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했다. 칸나바로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수비다. 수비수 치고는 작은 신체 조건(176cm)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커버 능력을 보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과 발롱도르 수상을 해냈다. 권경원은 칸나바로의 경험을 흡수한 셈이다.    출처:스포탈코리아

12월01일

'유리몸 원조' 우드게이트, 베일에 보내는 조언

[ '유리몸 원조' 우드게이트, 베일에 보내는 조언 ]     가레스 베일(레알 마드리드)이 64일 만에 돌아왔다. 올 시즌에도 부상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베일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베일은 지난 29일(한국시간) 열린 푸엔라브라다(3부리그)와 2017/2018 스페인 코파 델 레이(국왕컵) 32강 2차전에 교체 출전했다. 지난 9월17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 이후 첫 출전이다.  그동안 베일은 종아리와 허벅지 부상을 잇따라 당하면서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달 초 종아리 부상을 털고 훈련에 잠시 복귀했지만 불과 8일 만에 허벅지를 다치면서 또 회복 시간을 가져야 했다.   베일의 레알 마드리드 생활은 부상으로 얼룩져있다. 2013년 토트넘 홋스퍼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할 때만 해도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창창한 앞날을 그린 베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베일은 팀에 기여하는 바가 줄어들었다. 부상이 문제였다. 레알 마드리드서 보낸 다섯 시즌 동안 17차례 부상으로 쓰러졌고 18군데 부위를 다쳤다. 자주 전력외가 된 베일은 그동안 159경기 출장에 그쳤다. 레알 마드리드 전체 경기의 절반 수준이다.   지금의 베일을 보며 떠오르는 이가 있다. 2000년대 레알 마드리드서 수비수로 뛴 조나단 우드게이트다. 우드게이트가 레알 마드리드서 뛴 시간은 2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누가보다 유명세를 치렀다. 국내 축구팬들에게 툭하면 다친다는 의미로 가장 먼저 유리몸이라 불린 이도 우드게이트다.   우드게이트는 베일보다 더 심각했다. 2004년 레알 마드리드 입단 첫 시즌을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1년이 지나서야 데뷔전을 치렀지만 자책골에 퇴장까지 당하며 비판을 들었다. 그마저도 부상이 계속 반복되며 레알 마드리드서 뛴 2년간 고작 14경기 출전에 그쳤다. 우드게이트는 이후 미들즈브러, 토트넘 홋스퍼, 스토크 시티에서 활약했지만 번번이 부상에 가로막히며 기량을 만개하지 못했다.         부상악령에 시달렸던 그답게 베일의 마음을 달랬다. 그는 스페인 언론 '아스'를 통해 "베일의 기분이 어떨지 잘 안다. 나도 부상이 반복될 때 악몽같은 나날을 보냈었다"고 돌아봤다. 우드게이트는 "나는 레알 마드리드 첫 시즌에 경기를 뛰지 못했다. '대체 언제 내게 기회가 올까'라는 의문을 품은 채 나를 죽여갔던 것 같다"며 "두 번째 시즌마저 아스널을 상대로 크게 다쳤다. 경기 전날부터 허벅지가 안 좋았는데 문제가 터졌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상을 당했을 때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의 비판에 따른 상처다. 베일은 가뜩이나 세계 최고의 팀에 있다보니 압박감이 더 심할 것"이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베일은 시간을 더 들여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훈련에 더 매진해야 한다. 해결책은 항상 있고 베일은 이를 해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베일이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힘을 불어넣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출처 스포탈코리아

12월01일